창원 KBS1 라디오 <라이브 경남>에서 매주 월요일 이윤기의 세상읽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방송 내용과 조금 다른 초고이기는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2024. 1. 15 방송분) |
2015년 파리기후협약 종합보고서는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전 세계 환경운동가들과 시민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소비자들이 한 번 구입한 제품을 수리해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상품을 구입하여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려고 알아보면 고쳐서 사용하는 것보다 새로 사는게 더 이익인 경우, 많이들 경험해 보셨을텐데요. 오늘 소개 드릴 사례는 제가 소송 당사자로 직접 경험한 일인데요.
제가 일하는 마산YMCA에서 10개월 정도 사용하던 모니터가 고장 나서 제조회사에 수리를 요청했다가 구입가의 3배나 되는 터무니없이 비싼 수리비를 요구하여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정보공개 청구, 한국소비자원 분쟁조정신청 그리고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소액심판 청구 소송까지 진행되었는 피해구제 사례입니다.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021년 4월경에 화상회의용 공용컴퓨터에 사용하기 위하여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컴퓨터와 노트북 등을 판매하는 외국계 대기업에서 만든 27인치 컴퓨터 모니터를 179,000원에 구입하여 10개월 정도 사용하였습니다. 구입 후 10개월쯤 지난 2022년 2월, 화상회의를 준비하던 직원이 모니터가 고장 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조회사에 연락하였더니 고장 난 모니터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였고, 사진을 보냈더니 액정이 파손되었는데, 액정 파손은 소비자 과실이기 때문에 무상수리를 해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소비자기본법에 따라 구입 후 1년이 지나지 않은 제품이 고장 난 경우에는 무상수리를 해줘야하지만, 액정 파손은 소비자 과실이기 때문에 무상으로 수리를 해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모니터 액정 파손 수리비 54만원? 17만원에 샀는데...
소비자 입장에 보면,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 있던 모니터 액정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제조상의 결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조상의 결함을 입증하거나 소비자의 무과실을 입증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억울한 면이 있지만 부품값을 부담하고 유상 수리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업자 측에서는 터무니없이 비싼 수리비를 요구하였습니다.
10개월 전에 179,000원에 구입한 모니터 수리비로 54만원을 요구하면서 “수리하는 비용이 더 비싸니 그냥 새 제품을 구입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17만 9000원에 산 모니터 수리비가 54만원이라면 누가 모니터를 고쳐서 사용하겠습니까? 당시 같은 회사 신제품 모니터가 여전히 17만원대에 판매되고 있으니 새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이겠지요.
그런데...문제는 이렇게 되면 사업자는 수리 비용을 과다하게 청구함으로써 A/S를 거절할 수 있고, A/S를 위한 부품을 보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군다나 같은 회사 제품으로 소비자가 새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마산YMCA 시민중계실은 사업자의 이런 꼼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소비자기본법에서는 소비자가 사업자에게 가격 및 품질과 관련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고,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경우 한국소비자원에 정보공개심의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YMCA 시민중계실에서는 부품가격이 54만원이라는 사업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2022년 2월 23일 모니터 제조원가와 대리점 공급 가격 그리고 액정 부품 가격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하였습니다.
석 달 후인 5월 12일 한국소비자원은 4주 이내에 소비자에게 정보제공을 결정하였습니다만, 사업자는 정보 공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기본법에서 사업자에게 정보공개 의무를 지우고 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처벌 조항이 없다보니 사업자가 정보공개를 거부한 것입니다.
수리 부품 54만원... 제품 원가는 비공개
두 번째 단계로 22년 9월 22일에 한국소비자원에 분쟁 조정신청을 하였습니다. 분쟁 조정 결과는 해를 넘겨 8개월만인 2023년 5월 20일에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소비자원은 사실 조사를 통해 당시 제품의 출고가격이 199,000원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액정 교체 비용으로 소비자가 159,000원을 부담하면 수리해 줄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YMCA에서는 159,000원을 부담하더라도 수리를 해서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한국소비자원의 조정 결정을 받아였으나 사업자는 강제규정이 없는 분쟁조정 결과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가게 되었는데, 7월 10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에 모니터 수리를 거절함으로써 생긴 소비자의 손실을 보상해달라는 소액심판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소액 심판 소송이었지만 이례적으로 3차례나 공판이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업자가 부품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법정 증언 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소비자기본법에서는 제품이 단종되어도 모니터의 경우 최소 4년 이상 부품을 보유하고 있다가 수리를 해주도록 되어 있는데, 부품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부품이 없기 때문에 과도한 수리비를 청구하여 수리를 포기하도록 했고 대부분 소비자들은 이 과정에서 수리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소비자분쟁해결 기준은 법적 구속력 없어...
2023년 11월 19일 선고가 이루어졌는데 소비자인 원고가 패소하였습니다. 핵심적인 패소이유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고시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위법하지는 않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결국 1심 법원이 사업자가 제품 단종 후에 부품을 보유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품질보증기간 1년이 지나면 사업자가 생산을 중단한 제품은 수리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판결의 취지를 납득할 수 없어 YMCA 시민중계실은 즉시 항소를 결정하였고, 11월 23일 창원지법에 항소장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소장이 접수된 후 2주일 만에 사업자 측에서 소송 실비와 손실보상금 2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합의 제안이 이루어졌고, 항소심 법률 비용 등을 고려하여 고심 끝에 합의하고 항소를 취하하였습니다.
많은분들이 겨우 17만원짜리 모니터 때문에 2년씩이나 싸울일인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소비자운동을 하는 YMCA로서는 단 1명이라도 외국계 기업의 ‘꼼수’에 끝까지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결국은 소비자가 이기는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소비자의 권리로 ‘수리해서 사용할 권리’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수리해서 사용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입법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우리나라도 고장난 제품을 수리해주지 않고, 새제품 구입을 유도하는 사례가 근절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