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KBS1 라디오 <라이브 경남>에서 매주 월요일 이윤기의 세상읽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방송 내용과 조금 다른 초고이기는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2024. 12. 09 방송분) |
매주 이 시간 방송 주제를 정하기 위해 늘 지역 현안과 우리 사회의 여러 현안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모든 언론의 관심이 온통 계엄사태와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비상시국에 쏠려 있어 이번 주 방송을 어떤 주제로 해야할 지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다루고 있는 주제이지만, 작금의 이 엄중한 상황에 다른 어떤 주제를 다루어도 한가한 고민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국가비상 계엄사태에 대한 경험을 함께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계엄이 법률로 정해진 것은 1945년 해방 이후 4년이 지난 1949년 11월 24일입니다. 당시 정해진 계엄법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대응하거나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포하는 명령”으로 정의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 헌법 제77조는 계엄령을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계엄령이 최초로 선포된 것은 계엄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기 전인 48년 10월 25일 여순사건으로 법률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처음 선포되었으며, 48년 11월 17일 제주 4.3사건 때에도 법률로 뒷받침되지 않은 계엄이 대통령령으로 선포된 바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이번 12.3 계엄사태를 제외하고 그동안 모두 1번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60년 4월 혁명, 1961년 5.16군사정변,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유신,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0.26 대통령서거, 1980년 5.17 내란의 상황에서 계엄령이 발동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열 차례 계엄의 성격을 보면 국가비상사태보다는 “정치적 혼란을 제압하고, 독재 정권을 유지하거나 혹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엄령이 남용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된 계엄령은 1979년 10월 27일 선포된 9번째 비상계엄입니다. 10월 26일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이 계엄령은 영화 <서울의봄>으로 널리 알려진 1979년 12. 12쿠데타로 사실상 국가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다음날 시작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다치고 죽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79년 10월 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이 단계별로 확대되면서 1981년 1월 24일까지 무려 456일 동안 온 국민이 계엄체제하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 맞이한 첫 번째 계엄령은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선포된 계엄령입니다만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이 되었을 때, 50년이 지난 지금도 첫 문장을 잊지 않고 있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는데, 유신과 함께 선포된 계엄령의 산물이라는 것은 대학생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계엄의 산물 - 국민교육헌장 암송
제 기억에 뚜렷이 남은 계엄령은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마산지역에 내려진 계엄령입니다. 중학교 1학년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10월 18일, 당시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아침 집 앞 골목 입구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 2명이 대검을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때, 겨우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폭동’이라는 TV뉴스를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고, 제 주변 어른들중에는 고작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 계엄과 군사반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고 그런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이어진 456일동안 이어진 이 계엄령과 함께 벌어진 현대사의 비극은 대학생이 된 이후 제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된 후 당시 수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지금까지 사회운동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저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선포되지 않은 계엄령입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폭발한 6월 민주항쟁 당시 저는 서울 시내에 있는 유일한 육군부대에서 복무중 이었습니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군사독재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몇 달째 이어오던 폭동진압 훈련을 중단하고 출동대기 상태에서 두려움에 떨며 사흘을 보냈습니다.
선포되지 않은 계엄령과 6.29선언
연병장에 세워진 60트럭에는 실탄이 가득 실려 있었고, 밤에 잠을 잘 때도 군화를 신고 자야 했으며, 작전계획대로 출동했다면 성균관 대학으로 출동하여 학교를 점령하고 소요 사태를 중단시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기다리며 대기 상태에서 사흘을 보내는 동안, 진짜로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하나하는 고민에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부대안 어딘가에 숨을까? 아니면 평소 잘 알고 있는 높이가 낮은 담장을 넘어야 하는지 끝없이 고민하며 지내다 6.29선언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어제일처럼 선명해집니다.
지난주 12.3 계엄 사태 당시, 소위 아들을 둔 아버지가 “너 목숨지키는게 제일 중요하고, 두 번째는 민간인을 공격하거나 살상하는 행위를 절대하면 안 돼 알았어?”라고 다짐받는 전화 통화를 방송으로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아무리 달라도 군대에 간 아들, 딸을 둔 모든 부모들은 같은 마음으로 밤을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부모들과 같은 마음으로 울컥했을 뿐만 아니라 1987년 6월 그날, 사흘 동안 계엄령 선포를 기다리며 혼자 겪었던 두려움과 공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난 12월 3일 밤 국회를 지켰던 모든 분들과 실시간으로 계엄 현장을 지켜보던 국민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칩니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계엄령 선포한 대통령과 가담자들이 모두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만, 다시 계엄령이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과 다시 계엄령이 선포되면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국민을 향해 총을 들고 나가야 하는 모든 군인들의 두려움과 공포도 말끔히 해소될 수 있는 군통수권자에 대한 권한 정지가 제발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